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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華陽洞' 공간의 정치적 의미

초록/요약

兩亂과 명 멸망을 거치면서 형성된 尊周大義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의리의 차원으로 설정되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존주대의론의 전개 과정에서 형성된 ‘화양동’ 공간의 위상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의 흐름과 연계하여 살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후기 존주대의와 ‘화양동’ 공간을 유기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존주대의가 태동함에 따라 조성된 ‘화양동’ 공간의 여러 변곡점을 추적하였다. ‘華陽洞’은 현종 7년(1666) 송시열이 우거하기 시작한 이래 조선후기 尊周大義에 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곳으로 점차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화양동’에 머물며 중국식 의복을 착용하거나 명 황제의 어필 암각을 통해 이곳이 존주대의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조성하였다. 송시열 사후 그의 문인들은 송시열의 도통을 시각화한 華陽九曲 설정하여, ‘화양동’의 존주대의에 대한 위상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숙종 21년(1695) 己巳換局 당시 실추된 송시열의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송시열의 문인들은 ‘화양동’에 華陽書院을 건립 후, 사액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화양동’은 점차 노론의 정치·사상적 위상을 담지한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한편, 명 멸망 1주갑인 숙종 30년(1704)을 전후하여, 국가와 송시열의 문인들은 大報壇과 萬東廟를 설립하여, 존주대의를 현창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상주에서 영남 남인의 거두인 李萬敷와 ‘江門八學士’의 일원인 成晩徵 간에 만동묘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이의 핵심은 만동묘의 非禮性과 黨論의 유무였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화양동’은 숙종 42년(1716) 이루어진 丙申處分을 통해 노론의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세기 접어들어 국가가 존주대의를 주도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함에 따라 ‘화양동’ 또한 한 차례 변동을 맞이한다. 영조는 ‘화양동’에 대한 견제를 통해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보단에 홍무제와 숭정제를 합사하는 등 만동묘와 대보단 간의 위계를 설정하였다. ‘화양동’을 견제하였던 영조와 달리 정조는 ‘화양동’과 송시열이 지닌 존주대의에 대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정조는 정조 즉위년(1776) 발생한 ‘이명휘 옥사’를 통해 이러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화양동’과 송시열의 이미지를 어디까지나 존주대의의 명목에만 국한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정조는 󰡔尊周彙編󰡕 「皇壇志」의 부록으로 「華陽洞志」를 수록하여, ‘화양동’이 존주대의의 자장 하에 포섭되었음을 드러내었다. 17~18세기를 거쳐 확고한 정치·사상적 지위를 획득한 화양동은 19세기에도 그 위상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화양동’의 폐단 또한 지적되었다. 순조 3년(1803) 11월 ‘강세정 사건’을 통해 공권력에 직접적인 도전을 하거나 ‘福酒村’과 ‘華陽墨牌’를 통해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였다. 한편 ‘화양동’은 이곳의 정치‧사상적 지위를 강조해주던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연이어 철폐됨에 따라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고종 11년(1874) 만동묘가 복설됨과 동시에 국가 사전체제 하에 편입되어 ‘화양동’의 위상은 다시금 강화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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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目 次



1. 머리말 1

2. 尊周大義 현창사업의 전개 5

3. 17세기 ‘華陽洞’ 조성과 정치적 공간화 14
1) ‘華陽洞’ 조성과 공간의 상징 14
2) ‘華陽洞’을 둘러싼 논란 22

4. 18~19세기 ‘華陽洞’의 위상 변화 30
1) 영·정조대 ‘華陽洞’ 위상의 재정립 30
2) 고종대 ‘華陽洞’의 국가체제 편입 42

5. 맺음말 53

부록 55

參考文獻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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