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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사상계의 율곡 경세론 수용과 전개

Acceptance and Development of Yulgok Statecraft in the 17th Century Intellectuals

초록/요약

본 논문은 17세기 사상계에서 율곡 경세론이 수용된 양상과 그 특징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율곡은 당대 경세론을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정치적 요인에 의해 부정적으로 평가되거나 조정에서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다. 율곡의 위상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인조반정 이후였다. ‘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율곡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율곡의 위상 변화와 함께 경세론도 국정운영 과정에서 다루어졌다. 율곡학파 계열은 정계에서 주도권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정책의 많은 부분에서 율곡의 경세론을 제시하였다. 대동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점차 대동법의 취지가 율곡의 공납제 개혁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논리로 정립되어 갔고, 종모법은 율곡이 제시했다는 점에서 송시열 등에 의해 정책 추진 근거로 제시되었다. 율곡 경세론은 당대 지식인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어 갔다. 이유태의 「기해봉사」나 유계의 「강거문답」은 율곡이 제시했던 경세책의 구조를 모방하여 구현되었다. 이들은 율곡학파 계열임과 동시에 율곡 경세책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며 경세책의 이론적의 이론적 토대로 율곡의 견해를 채택했다. 유형원은 북인계-남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반계수록 을 통해서 율곡 경세론을 적극적으로 인용하였다. 유형원은 군역, 관료제, 과거제, 군현제 등에서 율곡 경세론을 기반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공전제를 기초로 한 사회개혁안을 전개하며 노비제 혁파 등 율곡이 구상하지 않았던 분야에까지 이상사회 구현을 위한 견해를 제시하면서 율곡 경세론의 수용과 발전 양상을 보여주었다. 17세기 사상계에서 율곡의 경세론은 율곡학파 뿐만 아니라 비 율곡학파에 이르기까지 점차 외연이 확대되었으며, 사회경제정책과 경세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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