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 陶磁 明器 硏究
A Study on Myeong-gi during Joseon Dynasty
- 주제(키워드) 조선시대(朝鮮時代) , 도자(陶磁) , 백자(白磁) , 명기(明器) , 와명기(瓦明器) , 목용(木俑) , 분묘(墳墓) , 상례(喪禮) , 주자가례(朱子家禮) , 사서례(士庶禮) , 관요(官窯) , 지방요(地方窯)
- 발행기관 고려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방병선
- 발행년도 2021
- 학위수여년월 2021. 2
- 학위구분 석사
- 학과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 세부전공 미술사
- 원문페이지 239 p
- UCI I804:11009-000000235220
- DOI 10.23186/korea.000000235220.11009.0001178
- 본문언어 한국어
- 제출원본 000046074071
초록/요약
明器는 전체 喪禮의 역사에서 朝鮮時代를 기점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부장 문화로, 특히 16-18세기 분묘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부장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명기가 당시 조선의 예학 사상과 흐름을 같이하기 때문에 나타는 현상으로, 따라서 명기는 조선의 사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명기에 대한 연구는 특정한 부분에만 치우쳐 있거나, 자료의 부족으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여 본고에서는 명기의 기원에서부터 조선시대 명기가 수용되는 양상과 수용 이후의 조선에서 전개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하였다. 명기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중국의 春秋戰國時代로 사실상 유가 사상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개념이다. 이후 漢代를 거치면서 명기의 개념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정의되었으며, 일반 부장품과는 구별되는 ‘不可用’의 특성이 강조되었다. 이후 유교 사상이 심화되는 宋代를 거치면서 일반 士庶禮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개념이나 성격 자체는 漢代까지 정립된 명기의 내용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으며, 제도적인 측면에서만 시대별로 재질과 수량, 기형 등의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 명기가 가장 먼저 확인되는 곳은 國家典禮書로, 『世宗實錄』「五禮」(1454)를 시작으로, 『國朝五禮儀』(1474)와 같은 국초 편찬된 예서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앞의 두 전례서 모두 명기의 기본 개념은 『禮記』와 『朱子家禮』를 따르되, 특히 『朱子家禮』에서 언급한 ‘작은 크기’를 통해 ‘不可用’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례서에서 언급한 명기의 종류는 크게 악기, 무기, 모형(목용), 제기, 기타로 나뉘며 재질은 와기와 목기, 백자로 기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기의 구성은 중국 漢代와 매우 유사하며, 이는 동시기 명의 예제를 참고할 수 없었던 조선 전기의 특수한 상황과도 맞닿아있다. 명기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은 분묘·가마터·건물지에서 출토되는 출토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크게 명기의 사용계층과 수량, 제작과 유통, 지역별로 전개되는 명기의 양상, 기형별 특징 등으로 분류하여 고찰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4개의 시기로 구분하였으며, 시기별 명기의 특징과 제작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먼저, 명기가 출토된 분묘의 피장자는 대부분 2-3품의 고위 관직자가 많으며, 지방으로 가면서 관직과 상관없이 유력 가문의 일원이나 향촌 사족을 중심으로 부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명기의 수량은 예서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대체로 10-30점 정도가 출토되고 있다. 다만, 기록과 같이 구체적인 품계에 따른 수량 차이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품계가 있는 경우 10-30점으로 편차가 크고, 품계가 없는 서인의 경우 10점 내외로 부장 수량이 적은 편이다. 성별에 따른 차이도 확인되는데, 여성의 경우 대체로 10-20점 사이로 남성보다 적게 부장되었다. 조선시대 제작된 명기의 대다수가 백자로 제작되었던 만큼, 주로 가마터에서 명기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지역별 가마터 출토품과 분묘 출토품의 출토 양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는 생산지와 최종 소비지가 지역적으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명기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과 출토지의 성격 등을 고려했을 때 명기는 크게 세 가지의 유통 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시전행랑과 같은 가게를 통해 유통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청진 유적의 출토사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지방의 경우 이와 같은 출토사례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아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6-17세기 지방에서 간행된 일기류는 이런 점에서 당시 지방에서 명기가 유통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크게 地方官이나 官匠에게 부탁해 명기를 마련하는 방법과 직접 가마에 대가를 지불하고 명기를 마련하는 방법으로 나뉜다. 이렇게 마련된 명기는 타지역에 거주하는 친인척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지역별 명기 출토 양상과 기형별 특징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 명기의 제작 시기를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Ⅰ기는 명기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는 15세기 말부터 본격적인 일괄품이 등장하기 이전인 1550년까지로, 이 시기는 유교식 상장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명기가 출현한다.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출토사례가 확인되며, 기형도 ‘앵·주병·접시·와명기·인물·마형 명기’와 같은 일부 기종이 먼저 제작되기 시작한다. 다만, 이 시기는 아직 명기가 기존의 부장품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해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인다. Ⅱ기는 본격적으로 명기 일괄품이 등장하는 1550년부터 기형 변화가 적은 1600년까지로, 이 시기는 예학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명기가 정착된다. ‘앵·주준·주병·반발·수기·관이·관반·타우·잔·접시’가 하나의 세트로 출토되기 시작하며, 기형은 주로 16세기 전·중반의 중앙관요에서 제작된 일상·특수 기형을 모방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Ⅲ기는 1600년에서 1660년의 시기로 양란이후 해이해진 예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예의 실천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지방에도 예서가 보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기가 점차 지방까지 확산되었고, 기형도 지방요의 영향을 받는 등 변화가 발생한다. Ⅳ기는 1660년 이후로 사실상 사대부 분묘에서는 명기가 소멸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문인들의 기록에서도 명기를 부장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인되며, 실제 분묘 출토사례도 급감한다. 반면에 왕실의 경우 19세기까지 명기가 지속되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예학 논쟁의 흐름 속에서 왕실과 사대부를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했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고는 지금까지 주로 한정된 주제로만 연구되던 명기의 전반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형성된 명기의 개념이 조선에 어떻게 수용되었고, 더 나아가 조선 내에서의 전개 과정과 양식 변천 등 다양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출토된 편년 자료 중 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에서 다소 미흡한 부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후 다양한 지방 편년자료의 발굴을 통해 보다 면밀한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more목차
Ⅰ. 머리말 1
Ⅱ. 조선시대 명기제도의 수용과 전개 5
1. 명기의 개념과 기원 5
2. 중국 명기제도의 전개 10
3. 조선시대 명기제도 수용 양상과 특징 21
1) 유교 사회로의 전환과 상례제도 변화 21
2) 국가 典禮書의 편찬과 중국 명기제도 수용 양상 26
Ⅲ. 조선시대 유적 출토 명기 현황 33
1. 출토 유적의 성격별 명기 현황 33
1) 분묘 33
2) 가마터 57
3) 건물지 75
2. 유적 출토 명기의 특징과 의미 83
3. 명기의 유통 88
Ⅳ. 조선시대 명기의 지역별 출토 양상과 기종별 특징 93
1. 명기의 지역별 출토 양상과 특징 93
1) 경기도 93
2) 충청도 97
3) 전라도 101
4) 경상도 104
5) 강원도 108
2. 명기의 기종별 형식변화와 특징 110
1) 예서의 도해와 유적 출토 명기 비교 110
2) 기종별 기형 변화와 특징 116
Ⅴ. 조선시대 명기의 시기별 특징과 제작 변화 152
1. 제 1기(15C 말-1550년): 유교식 상장례 보급과 명기 출현 152
2. 제 2기(1550-1600년): 예학 발달과 명기 정착 155
3. 제 3기(1600-1660년): 임란이후 예제 회복과 명기 확산 157
4. 제 4기(1660년 이후): 典禮 논쟁과 명기의 쇠퇴 162
Ⅵ. 맺음말 1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