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해주 소현서원의 운영과 위상 : The Operation and Status of Sohyeon-seowon in Joseon period
The Operation and Status of Sohyeon-seowon in Joseon period
- 주제(키워드) Eunbyeong-jeongsa (隱屛精舍) , Sohyeon-seowon (紹賢書院) , Seokdam (石潭) , Seowon (書院) , Yi Yi (李珥) , 은병정사 , 소현서원 , 서원 , 석담 , 이이
- 발행기관 한국사상사학회
- 발행년도 2019
- 총서유형 Journal
- KCI ID ART002460950
-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요약
소현서원(紹賢書院)은 이이(李珥, 1536~1584)가 해주에 건립했던 강학처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모태로 김장생, 박여룡 등 이이의 문인들에 의해 건립된 서원이다. 이이를 배향한 최초의 서원이며, 지역명을 따서 석담서원(石潭書院)으로 병칭되었다. 은병정사는 1610년 ‘소현’으로 사액되면서 학파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액 이후 소현서원은 문인계(門人契)의 제정, 『율곡집(栗谷集)』의 간행과 같은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학파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소현서원의 제향과 강학은 황해도 인근에 건립되었던 서원들의 모델이 되었다. 소현서원은 1586년 이이의 유지를 받들어 문인들이 주자사(朱子祠)를 건립하여 주희, 조광조, 이황을 배향한 이후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을 추향하였다. 추향의 과정은 추향인물들의 문묘종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율 문묘종사의 과정에서 17세기 중반 성혼이 추향되었고, 김장생과 송시열은 각각 문묘에 종사된 이후 소현서원에 추향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서인・노론계 인사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7세기 후반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계 문인들은 이이를 ‘동방의 주자(朱子)’로 인식하며 주희-이이-김장생으로 단일화된 도통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과정은 이기론이나 격물설과 같은 성리설(性理說)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소현서원 또한 제향과 이이의 강학처라는 의미로 인해 도통론과 연계되어 있었다. 소현서원은 주희가 강학했던 백록동서원이나 무이정사와 비교되며 조선의 대은병(大隱屛)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노론계 문인들은 제문(祭文)・시문(詩文)・기행문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기면서 자신들이 소현서원에 방문하여 느낀 사항들을 기록하였다. 송시열은 17세기 후반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고산구곡시(高山九曲詩)」를 그의 문인들과 함께 작성하며 소현서원과 그 주변의 구곡(九曲)을 관념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와 같은 회화 작품도 노론계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작되면서 자신들이 관념화한 이이와 소현서원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이 과정에서 소현서원은 율곡학파계열 인물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명승지로 정착되었다. 학파 차원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소현서원은 이이를 배향하는 최초의 서원으로서 주목되었다. 소현서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은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치제(致祭)와 서책을 하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외에 묘정비(廟庭碑)의 건립 등과 같은 조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후반 문묘종사 이후 선정(先正)으로서 이이의 위상 확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18세기 영조와 정조를 비롯한 이후의 국왕들은 선정(先正)이나 정학(正學)의 상징으로서 이이의 표상을 강조하며, 소현서원을 이이와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현서원은 학파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위상이 확립되면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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