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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산의 퇴계관 - [여유당전서] 시문집에 한하여 : Tasan’s View on Teogye’s Theory

Tasan’s View on Teogye’s Theory

초록/요약

퇴계에 대한 다산의 견해를 재검토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학술적 흐름의 계승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퇴계와 다산이 각각 성리학 중심의 조선 중기 학술계와 실학 중심의 조선 후기 학술계를 대표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퇴계에 대한 다산의 견해에 대하여 1. 퇴계의 가학 연원, 2. 다산의 『도산사숙록』에 비친 퇴계의 모습, 3. 이자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4. 이기설에 있어서의 다산의 퇴계관으로 각각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성호 이익의 사상과 학문을 흠모하고 존경했던 다산은 성호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는 퇴계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퇴계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가학의 연원 역시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산의 9대조인 정응두가 퇴계와 조반朝班에 함께 했으며 그의 아들 정윤희가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다산이 유년기에 이미 『퇴계집』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다산은 퇴계의 사상을 깊이 고찰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가 금정에 있을 무렵 작성한 『도산사숙록』을 통해 나타난다. 『도산사숙록』에 담긴 33칙의 연의에는 퇴계라는 위대한 지성에 비친 다산 자신의 결점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드러나 있다 『도산사숙록』에서 다산이 퇴계에게 사숙하고자 한 것은 대부분 인격 함양에 관한 것이었다. 퇴계와 다산은 고려시대의 인물인 이자현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 정인지를 비롯하여 서거정 및 정효항 등은 이자현에 대해 유학을 배웠으면서 유학자의 본문을 팽개치고 이단인 노불에 심취했다고 하면서 극력 비판한 반면 퇴계는 이러한 당시의 비난이 이자현의 높은 지조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자들이 지어낸 근거 없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이자현이 불교와 도교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이자현의 고결한 지조를 추존했던 퇴계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다산의 퇴계관은 이기설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에는 퇴계와 율곡으로 대표되는 이기설을 둘러싼 논쟁들이 있었다. 다산은 이에 대해 퇴계와 율곡이 리와 기를 논하고 있지만 각자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다산의 견해에 의하면 퇴계 이기론의 지향점은 부분적專인 것에 있으므로 그 논의가 주밀하고 상세하고 율곡 이기론의 지향점은 전체적總인 것에 있으므로 그 논의가 소활하고 간결하다고 본 것이다. 이를 통해 두 학자의 이기설을 인정하면서 각 학파의 특징을 포착하고 그 이해의 합일점을 절충하고자 한 다산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은 50세 이후에 결국 성리학과 결별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인간의 심성에 내재한 측은•수요•사양•시비는 단지 마음일 뿐 인의예지는 그러한 마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이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게 된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은 정주•퇴율 이래의 성리학설과 크게 다른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산 사상이 실학사상으로 귀결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정주 성리학의 절대 명제인 태극과 리에 대한 다산의 전면적인 부정은 퇴계학 뿐만 아니라 정주 성리학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퇴계에 대한 계승과 반동은 조선시대 학술계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항으로서 향후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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