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재지사족층의 친족결집 노력과 내적 균열양상 -호남지역 善山 柳氏家의 친족활동을 중심으로- : A Yangban Family's Striving for the Solidarity of Kinsmen and Its Failure in Late Chosŏn -focusing on the Ryus of Sun-san(善山 柳氏)'s Case-
A Yangban Family's Striving for the Solidarity of Kinsmen and Its Failure in Late Chosŏn -focusing on the Ryus of Sun-san(善山 柳氏)'s Case-
- 주제(키워드) 19세기 향촌사회 , 친족 , 공동체 , 호남화족(湖南華族) , 유희춘(柳希春) , 선산 류씨 , 의암서원(義巖書院) , 미암집(眉巖集) , the solidarity of kinsmen(親族 結集) , Rural community , the Yus of Sun-san(善山 柳氏) , the collection of Mi-am's works(眉巖集) , the memorial hall for Mi-am(義巖書院) , the solidarity of kinsmen(親族 結集) , Rural community , the Yus of Sun-san(善山 柳氏) , the collection of Mi-am's works(眉巖集) , the memorial hall for Mi-am(義巖書院)
- 발행기관 고려사학회
- 발행년도 2010
- 총서유형 Journal
- UCI G704-000690.2010..38.002
- KCI ID ART001422629
-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요약
『미암일기(眉巖日記)』저자로 잘 알려진 유희춘은 16세기 중앙관료이자 경학자로서 선조(宣祖, 1567~1608)의 신임을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담양지역 양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만년까지 정치적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희춘 사후(死後) 담양지역의 선산 류씨들은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채, 유학(幼學)이라는 직역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가세(家勢)를 유지해갔다. 이에 신분적 특권을 보장하는 국가적 시스템이 이완되어가던 19세기 시점에 이르러서야 담양지역 선산 류씨들은‘호남화족(湖南華族)’혹은‘명현의 후손’이라는 신분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담양, 부안, 곡성 등의 족인들과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써 유희춘의 문집 간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대묘 관리나 문집 간행과 같이 상징적인 가문현창을 도모하는 친족활동은 족인들이 분담해야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정서적 결속이 약한 원거리 족인들 사이에 경제적 갈등을 야기하기 쉬웠다. 결국 선산 류씨들의 친족 결집이 강화되던 19세기 당대에 오히려 친족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불거져 나왔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미암집(眉巖集)』은 이처럼 친족 간의 균열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던 19세기에 문중을 상징하는 매개체로서 친족공동체에 의해‘만들어진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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