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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論語說의 梗槪와 그 精髓에 대하여 - 茶山의“予所否者, 天厭之”解 : An outline and the essence of asan’s theory on the Analects of Confucius - Tasan’s analysis of“予所否者, 天厭之”

An outline and the essence of asan’s theory on the Analects of Confucius - Tasan’s analysis of“予所否者, 天厭之”

초록/요약

茶山의 『論語古今注』에는 다산이 이것이야말로 『논어』의 본뜻이라고 주장하며 요약해 놓은 175조의 「原義總括」이 있다. 그 가운데 다산의 創見으로 간주할 수 있는 조목이 69조에 이르며, 창견이지만 우연히도 先儒나 동시대 학자의 설과 부합하는 설이 33조에 이르는데 이를 합하면 모두 102조에 이른다. 고금의 모든 학자들 가운데 『논어에 3대해 이렇게 많은 자기의 주장을 펼친 사람은 그 유례가 드물 것이다. 다산은 이 가운데 9조를 가려 「自撰墓誌銘」에 실음으로서 이야말로 자신의 논어설의 精髓라 간주하였다. 필자는 그 가운데서도 제7조인 ‘孔子가 南子를 만난 것은 반드시 衛나라 內亂을 구원하고 母子간의 恩義를 온전히 하기 위한 데 있었음을 밝힌다.(辨子見南子, 必由救亂全恩)’는 것이야말로 다산의 직관과 객관이 교직되어 이루어낸 탁월한 성과라 여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공자가 남자를 만난 시기를 『史記·孔子世家』나 이를 부연한 『孔子家語』의 설을 따라 衛靈公 在位時로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위령공이 죽고 나서 蒯聵의 아들 蒯輒(出公輒)이 즉위한 후 귀국하여 즉위하고자 하는 아버지 괴외와 권좌를 지키려는 아들 괴첩 간의 갈등이 일어났을 때라고 생각하였다. 이 당시 권력이 南子의 손에 있었으므로 南子를 만나 이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로 망명하게 된 공자 괴외에 대해 孔子는 ‘명분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蒯輒이 왕위를 아버지 蒯聵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다산은 주장하였으며, 그리하여 「原義總括」 175조의 53조에서 “辨子見南子, 必由救亂全恩”이라 개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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