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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조선의 대중국 무역 : Chos?n’s trade with china since 1930's

Chos?n’s trade with china since 1930's

초록/요약

- 93 -일제는 수출진흥책으로 수출조합법의 제정, 중요수출품검사제도의 실시, 일본제품의 해외선전 및 무역통신원의 설치, 수출보상법의 제정 등을 통해 무역진흥정책을 강구했다. 또한 일본제품의 수입을 통제하는 것에 맞서 무역조절 및 통상옹호에 관한 법령을 반포하고 이를 조선에도 확대 적용시켰다.조선총독부는 1932년 조선무역협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1933년 4월부터 집무를 개시했다. 처음에는 대 만주국 무역의 촉진을 위해 주력했으나 중국의 각 주요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선상품의 소개, 선전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見本市를 여러 차례 개최하여 시장확대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또한 대 중국 무역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대 중국 항로를 증설하기도 했다.중일전쟁 이후에는 대륙경제와의 연결이 보다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외화획득을 위해 대 엔블록 수출에 대한 제한정책을 펴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과의 무역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무역관계자들은 지속적으로 제한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다. 또 개별적인 무역회사 만으로 무역을 통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역회사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무역회사를 설립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과도적으로 조선무역협회를 대행기관으로 삼았다가 1941년 4월 조선동아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이를 무역조정기관으로 선정했다.1930년대 이후 대 중국 무역은 양적으로 보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32년을 기준연도로 하여 1944년에 수출은 37배 증가했고 수입은 7배 증가했으며 수출입 합계는 13배 증가했다. 또한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938년을 경계로 무역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무역의 확대의 수혜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었음을 유의해야한다. 견본시에 출품한 명단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이는 당시 무역을 총괄했던 조선무역협회의 집행부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다는 것과도 상관관계를 지닌다. 당시 조선경제를 연구했던 일본인학자나 무역관계자들은 조선경제가 질적으로 변화했으며 이것이 무역에서도 드러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식료품·원료품과 식료품·원료품의 교환체계였다는 한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중요 수출상품은 쌀, 밀가루, 설탕, 청주, 인삼, 흑연, 광유, 목재, 면직물, 인조견, 차량과 同부속품 등 이었다. 중요 수입상품은 좁쌀, 콩류, 참깨, 고추, 소금, 繰綿, 綿子, 석탄, 철광, 중국마포 등이었다. 특히 쌀은 중일전쟁 이후 급증하여 1939년에는 39.4%를 차지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되었다. 이는 중일전쟁이라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들의 기호변화로 조선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만으로는 쌀수출이 1937년을 기준연도로 하여 1939년에 90배 이상 증가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중국에서 조선쌀 배급시에 육군특무기관에서 관여한 것을 보면 이는 전쟁에서의 군식량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94 -1930년대 이후 조선무역이 질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은 중국의 사례를 통해서도 근거가 약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과 중국간의 무역은 기본적으로 농산물과 농산물의 교환체계였다. 그런데 중일전쟁 이후 쌀은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많은 양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던 반면 좁쌀은 중국의 좁쌀수출 금지정책로 1938년부터 수입되지 못하여 조선인들의 식량난이 가중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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