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

청 입관 전후 瀋陽館을 둘러싼 조청관계

초록/요약

조선은 개국 초부터 명에 대해서는 事大를, 倭와 女眞에 대해서는 交隣을 원칙으로 하는 대외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는 명에 대한 사대와 대명의리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대명의리는 보편적인 가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부터 동북아 질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1616년에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Nurhachi, 努爾哈赤]는 汗이 되어 後金을 세웠다. 힘을 키운 누르하치는 1621년에 명나라의 瀋陽과 遼陽을 무너뜨리고 都邑을 심양으로 옮겼다. 누르하치의 흥기와 함께 조선 조정은 명을 위해 후금과 싸울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결국 명을 선택한 조선은 1627년에 후금의 침략을 당하였고 丁卯胡亂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이후 명과 후금의 싸움이 지속되었고 조선도 계속 끼여 있었다. 명과의 전쟁에서 더욱 강해진 만주는 마침내 1636년에 나라 이름을 大淸으로 바꾸었고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丙子胡亂이었다. 정묘·병자호란은 청과 조선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조선의 昭顯世子 일행이 인질로서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1637년 4월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 도착한 후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동관에 머물다가 5월에 瀋陽館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청이 입관하는 1644년까지 두 번에 걸쳐 1640년 3월-4월 초까지, 1643년 1월-2월 19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역할로 활용되었다. 본고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청의 入關 전후의 조청관계를 분석한다. 본고가 이 시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래의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시기에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도 전에 다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다.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청에게 항복하여 君臣之國의 관계를 수립한 것은 조선 유교 지식인들의 관념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청조의 입관 전후 시기는 명청 교체로 동아시아의 세력관계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되고 조청관계 역시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특수한 시기였다. 따라서 1644년 명의 멸망과 청의 입관은 조청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특히 이 시기의 심양관에 주목한다. 병자호란 이후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조선과 청의 관계는 소현세자 일행이 머무르는 심양관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심양관은 세자를 비롯한 조선의 인질들이 머물렀던 장소이지만, 본고에서는 그러한 지리적이나 행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심양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청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심양관이 조선과 청 사이의 외교적 창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more

목차

序論 1

Ⅰ. 병자호란과 심양관 8
1. 전쟁의 발발과 사후처리 8
2. 심양관 및 소현세자 15

Ⅱ. 심양관에서 이루어진 교류 19
1. 소현세자의 공식적인 교류 19
2. 심양관에서의 私적인 교류 27
1) 소현세자와 八王 아지거 27
2) 淸譯 굴마훈과 심양관의 조선인들의 교류 29
3. 봉림대군과 大明遺民들 31

結論 37

參考文獻 41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