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보통학교에 대한 지역 간 대응의 차이에 관한 연구
- 주제(키워드) 보통학교
- 발행기관 고려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한용진
- 발행년도 2010
- 학위수여년월 2010. 8
- 학위구분 석사
- 학과 일반대학원 교육학과
- 원문페이지 73 p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korea/000000024180
- 본문언어 한국어
- 제출원본 000045608965
초록/요약
본고는 1910년대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을 ‘지역적 차이’라는 현상에 주목하여 도시와 농촌 간의 대응의 차이를 비교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였다. 본고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10년대 이전에 이미 소학교·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에는 다양한 집단 간의 상이한 대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소학교·보통학교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현격한 차이 중 하나는 재지양반층과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재지양반층은 대체로 신학문 자체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소학교·보통학교를 기피하였다. 또한, 같은 이유로 이들은 소학교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사람들도 보통학교 개편 초기까지는 소학교·보통학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재지양반층과는 달리 소학교가 신학문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라 소학교·보통학교의 위상이나 운영방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만,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어 사회 각 분야에서 신학문, 특히 일본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학제가 개편되어 보통학교 졸업장이 중등학교로 진학하는 데에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에도 점차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둘째, 1910년대에는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적 변화’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보통학교 재학생수·학교당 학생수는 점차 증가하였으며 취학률도 향상되었다. 입학지원자는 계속 증가하여 1915년을 기점으로 모집정원을 초과하게 되었다. 출석률도 점차 제고되었다. 학생모집의 형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업료의 징수도 점차 확대되었으며 수업료 정액도 인상되었다. 이를 통하여 본다면, 일부 선행연구들이 저조한 취학률 등을 근거로 하여 1910년대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을 ‘민족적 반감에 의한 기피’로 단정했던 것은 이러한 조선들의 대응의 ‘시간적 변화’라는 측면을 간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1910년대 보통학교에 대한 도시와 농촌 간의 대응의 차이는 매우 현격했다. 보통학교 취학률이 저조했던 이 시기에도 도시민들만큼은 보통학교 취학에 적극적이었다. 도시 소재 보통학교들은 재학생수·학교당 학생수가 상당히 많았다. 입학지원자수는 1910년대 초반에 이미 모집정원을 초과하였으며, 이에 따라 입학시험 등과 같은 선발방식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동원되었다. 그 결과 도시민의 취학률은 상당히 높아졌으며, 특히 부의 취학률은 1910년대 후반에 이미 20∼30%대를 기록할 정도로 크게 향상되었다. 학생모집이 수월해지자 도시 소재 보통학교들은 수업료 징수를 점차 확대하였으며, 수업료 정액도 상대적으로 크게 인상하였다. 특히, 경성 소재 보통학교들은 수업료 징수가 시작되었던 1912년에 이미 상당한 액수를 수업료 정액으로 책정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인상폭도 절대액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 반면, 이 시기에 농촌민들은 보통학교 취학에 소극적이었다. 농촌 소재 보통학교들은 재학생수·학교당 학생수가 매우 적었으며, 1910년대 후반에도 입학지원자수가 모집정원에 미달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농촌민의 취학률은 약 6%에 불과할 정도로 저조했다. 학생모집이 여전히 어려웠으므로 농촌 소재 보통학교들은 수업료 징수를 쉽사리 확대할 수 없었으며, 수업료 정액도 낮은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넷째, 보통학교에 대한 도시와 농촌 간의 대응의 차이는 양 지역의 직업구성비의 차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와 농촌의 직업구성비는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농촌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업인구로 구성되었던 반면, 도시인구의 상당수는 상업인구였으며 농업인구는 소수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농촌의 농업인구가 주로 자소작농·소작농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도시, 특히 부의 농업인구는 상당수가 지주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취학률이 저조했던 1910년대에도 상인들과 지주들의 취학률은 상당히 높았다. 전자는 일상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 신학문, 특히 일본어가 필요했으므로 보통학교 취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자는 학제가 정비되고 보통학교 졸업장이 중등학교로 진학하는 데에 점차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보통학교 취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통학교 취학에 적극적이었던 상인과 지주들이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도시민들의 보통학교 취학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more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 선행연구 분석
3. 분석방법
Ⅱ. 1910년대 이전 시기 소학교·보통학교의 현황
1. 갑오개혁 이후 소학교의 현황
2. 통감부기 보통학교의 현황
Ⅲ. 1910년대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
1. 보통학교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과 시간적 변화
2. 보통학교에 대한 도시와 농촌 간의 대응 비교
3. 도시민의 보통학교 취학요인 분석
Ⅵ. 요약 및 결론
1. 요약
2.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