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

1883年 金玉均의 借款交涉과 淸⋅日의 朝鮮保護論

초록/요약

1876년 開港 당시 朝鮮은 이미 내부적으로 쌓여 있던 문제를 안고 외부적으로 帝國主義 列强의 침탈까지 막아내야 하는 二重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二重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金玉均을 비롯한 開化黨 세력은 借款을 통한 ‘財政’안정을 선택하였다. 이 교섭을 통해 김옥균은 차관을 이용하여 鑛山, 軍備 등에 투자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本位制를 이루려 한 점이 포착되었다. 이는 이제 막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조선이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세계질서가 뒤바뀐 가운데 조선 집권층 내부에서 김옥균이 가장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옥균의 차관도입은 실패하고 말았다.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甲申日錄』을 그대로 받아들여 日本公使 竹添進一郞의 방해를 차관교섭의 실패 원인으로 거론하였으나 방해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였다. 또한 차관교섭 과정에서 드러난 김옥균의 한계를 밝혀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竹添의 방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김옥균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나 그 입지가 불안한 측면과 김옥균의 政敵이 되는 묄렌도르프는 조선 및 일본을 위하여 공평한 인물이며 全權은 척족 민영목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한 점이다. 결국 日本 外務卿 井上馨은 이 보고를 토대로 김옥균의 차관교섭을 철저히 거절하였다. 김옥균은 바로 위와 같은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井上에게 全權 소재 여부를 확실히 밝히지 못하였으며 담보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준비과정의 부실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교섭이 실패 한 후 미국을 상대로 한 교섭에서도 ‘全權委任狀’에 자신의 관직을 사칭하거나 외아문 독판의 인장을 모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김옥균은 이와 같은 약점을 드러내면서 차관교섭에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淸ㆍ日의 共同保護 논의는 끝내 김옥균에 대한 거액의 차관 제공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대한 共同保護를 구상하는 이상 굳이 김옥균에게 거액을 안겨 주어 淸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들은 1883년 당시 일본정부가 조선에 대해 不干涉으로 일관하거나 獨立公認化, 혹은 朝鮮永世中立化를 기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정부는 조선 진출을 여전히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조선에서 현실로 자리 잡고 있던 淸의 위력 때문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논의를 토대로 조선 ‘獨立’이 아닌 조선에 대한 共同保護를 淸에 제의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본정부가 조선에 대하여 不干涉, 獨立公認化, 혹은 朝鮮永世中立化를 기도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隨時臨機’원칙에 따라 淸과 타협하면서 ‘공동보호’를 통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결국 조선은 김옥균의 차관교섭 실패를 뒤로 하고 1884년 甲申政變을 맞이하였다. 차관교섭 실패 이후 정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더욱 고민해 볼 것이지만 갑신정변의 前史가 되는 1883년이라는 시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1884년 정변이 더욱 선명히 드러낼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볼 때 1883년 김옥균의 차관교섭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more

목차

Ⅰ. 머리말 1

Ⅱ. 1882年 第1次 借款交涉과 日本의 臨機應辯的 態度 10

Ⅲ. 1883年 第2次 借款交涉을 둘러싼 國內外 情勢 22
1. 國內情勢의 變化와 朝鮮共同保護 論議의 擡頭 22
2. 日本에서 이루어진 朝鮮共同保護 交涉과 國際法的 意味 35

Ⅳ. 1883年 第2次 借款交涉의 失敗 50
1. 借款導入運動과 日本公使 竹添의 動向 50
2. 全權 不在와 竹添의 報告에 따른 對日借款交涉의 決裂 63
3. 國債委任狀의 僞造와 借款交涉의 終末 76

Ⅴ. 맺음말 86

참고문헌 93

more